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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PUBLISHED · 2026년 6월 23일·10 MIN READ

대포통장 신고했더니 되레 소송… 피해자 90%가 패소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대포통장을 신고하자, 통장 주인이 거꾸로 채무 부존재 확인 소송을 거는 일이 늘고 있다. 최근 5년 판결 306건 중 소송을 건 쪽이 90.5%를 이겼다.

#사회#보이스피싱#대포통장#범죄#법원
Fake bank account victims sued, 90% lose in court

원문: 대포통장 신고했더니 되레 소송… 피해자 90%가 패소 — 동아일보

개요 #

보이스피싱에 당한 돈을 막아 보려 대포통장을 신고했더니, 통장 주인이 거꾸로 피해자에게 소송을 거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소송 이름은 '채무 부존재 확인의 소'. '나는 갚을 빚이 없으니 묶인 통장을 풀어 달라'는 내용이다.

문제는 이 소송에서 피해자가 번번이 진다는 데 있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최근 5년간 법원 판결 306건을 전수 분석한 결과, 소송을 건 쪽이 277건을 이겼다. 승소율 90.5%. 사기당한 돈을 마지막으로 붙잡아 두는 안전장치가, 법원을 거쳐 합법적으로 풀려나고 있는 셈이다.

5분 만에 사라진 노후 자금 #

대전에 사는 이기철(가명·72) 씨는 2023년 4월 보이스피싱에 당했다. 금융감독원 직원을 사칭한 전화가 시작이었다. "이기철 씨 명의가 도용돼 6400만 원이 대출됐다"는 말에 이어, 인천지검 수사관을 자처한 남자가 "대출을 취소하려면 900만 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미심쩍었던 이 씨는 직접 인천지검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어 그런 수사관이 실제 있는지 확인까지 했다. 진짜라는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휴대전화는 이미 해킹돼 있었고, 직접 건 전화마저 조직에 가로채기를 당한 상태였다. 안내원인 줄 알았던 목소리도 조직원이었다.

이 씨가 송금한 900만 원은 단 5분 만에 대포통장 여러 개를 거쳐 해외 코인 거래소로 빠져나갔다. 젊은 시절 공장에 다니고 타일을 붙이며 모은 돈이었다. 이틀 뒤 경찰에 신고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신고했더니 날아온 소장 #

피해금이 코인으로 바뀌기 직전 거쳐 간 계좌가 변주석(가명·36) 명의였다. 이 씨의 신고로 그 통장은 동결됐다. 그러자 변주석은 거꾸로 이 씨에게 소장을 보냈다. "나는 코인 환전업자일 뿐이고, 정당하게 코인을 팔고 대금을 받았는데 신고 탓에 통장이 막혀 손해가 막심하다"는 주장이었다.

변주석은 사실 조진수(39·가명) 일당의 일원이었다. 보이스피싱 조직과 손잡고 2023년 2월부터 움직인 전문 대포통장 조직이다. 이들에게 소송은 즉흥적인 대응이 아니라, 사전에 짜 둔 돈세탁 공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이기면 동결된 통장이 살아나는 것은 물론, 그 안에 묶인 피해자 돈까지 합법적으로 빼낼 수 있었다. 통장 주인이 소송에서 이기면 은행이 동결을 풀어 줘야 한다는 현행 제도의 허점을 정확히 파고든 것이다.

입증 책임은 피해자에게 #

7개월 뒤 법원은 조진수 일당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도 이 씨가 보이스피싱 피해자라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발목을 잡은 건 대법원 판례였다. 상대가 "갚을 돈이 없다"고 주장하면, 갚을 돈이 있다는 사실은 이 씨가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기를 당한 피해자가 '저 사람은 사기꾼이 맞다'는 걸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구조였다.

칠순 노인이 범죄 조직을 상대로 들이밀 수 있는 증거는 '내 돈이 5분 만에 변주석 통장으로 흘러갔다'는 거래내역표 한 장이 전부였다. 변호사 선임비 500만~700만 원이 없어 홀로 법정에 섰다.

반면 일당은 고객과 주고받았다는 코인 거래 대화 내역까지 증거로 냈다. 알고 보니 자기들끼리 1인 2역을 한 가짜 대화였다. 다른 조직원이 통장 주인인 척 "코인을 사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면 변주석이 환전업자인 척 답장하는 식으로 통째로 꾸며 낸 것이다. 결국 이 씨는 패소했고, 일당 측 소송 비용까지 떠안았다.

조작극은 들통났지만 #

완전 범죄 같던 사기극은 1년여 뒤 엉뚱한 곳에서 금이 갔다. 조직원 한 명이 중고 거래 사기를 치다 붙잡혔고, 압수된 휴대전화에 법원에 제출했던 '코인 대화'의 제작 과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기록을 넘겨받은 검찰이 대화를 한 줄씩 뜯어보자 허점이 드러났다. 이 사건을 수사한 임지수 대구지검 김천지청 부장검사는 "대화가 오간 시간과 실제 돈이 움직인 시간이 맞지 않았다"고 했다. 검찰은 수사를 소송 사기로 확대해 일당을 재판에 넘겼다. 법원을 속여 동결 통장을 되살린 수법이 법정에 오른 첫 사례였다.

올 4월 말 인천지법 2심에서 재판부는 "자금세탁책으로 보이스피싱 범죄에 핵심적으로 가담해 사회적 해악이 매우 크다"고 질타했다. 그런데 선고 형량은 1심보다 오히려 가벼워졌다. 조진수 징역 2년, 변주석 징역 1년 6개월. "최근 일부 피해자와 합의하고 피해금을 돌려주려 노력했다"는 게 감형 이유였다. 일당 일부는 줄어든 형량마저 무겁다며 대법원에 상고했다.

싸울 힘을 잃은 피해자 #

유죄가 확정돼도 이 씨의 돈은 돌아오지 않았고, 패소한 소송 결과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사이 이 씨의 삶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최근엔 코인 투자 사기까지 당해 남은 재산마저 잃었다. 보증금 100만 원짜리 방의 월세 22만 원을 기초연금으로 간신히 메운다. 피해 후 쓰러져 혈압약을 먹기 시작했고, 한때는 운전대를 잡고 해선 안 될 생각까지 했다.

재심을 권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재판에서 또 지면 그 사기꾼 놈들 변호사 비용을 내가 물어내야 하잖아요. 난 이제 무서워서 법원 근처에도 못 갑니다."

대포통장 동결은 사기당한 돈이 세탁돼 사라지기 직전에 붙잡아 두는 마지막 안전장치다. 그 장치를 합법적으로 풀어 버리는 통로가 법원에 열려 있는 한, 되살아난 통장은 또 다른 피해자의 돈을 빼내는 데 다시 쓰일 수밖에 없다.


이 글은 위 출처를 바탕으로 한국 독자를 위해 재작성한 기사입니다. 원문의 사실과 수치에 근거하며, 별도의 견해를 포함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