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폭우 쏟아진 것도 아닌데 거대한 물벽 덮쳐” 기후변화의 재앙 — 동아일보
개요 #
비가 오지 않았는데 마을이 물에 잠겼다. 8월 26일 네팔 북부 라수와, 중국 티베트자치구와 맞닿은 국경 지역에서 돌발 홍수가 일어났다. 히말라야에서 홍수라면 대개 폭우가 원인이지만 이번은 달랐다.
네팔 수문기상국(DHM)과 국내외 기상 전문가들이 지목한 원인은 빙하 붕괴다. 온난화로 빙하와 주변 눈이 녹아내리면서 강물을 막는 임시 댐이 만들어졌고, 그게 터지면서 물이 한꺼번에 쏟아졌다고 본다. 강수량과 강물 수위를 기준으로 만든 기존 경보 체계는 이런 상황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손쓸 틈 없이 몰려든 급류 #
생존자들의 증언은 하나같이 비슷하다. 피할 시간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네팔 국경마을 티무레의 라젠드라 둥가나 세관장은 현지 언론에 “땅이 흔들려 지진인 줄 알았는데 밖으로 나오자 화산이 폭발하듯 물살이 밀려왔다”고 말했다. 거대한 물벽(wall of water)이 시장을 덮쳤고, 세관 주변에 세워둔 차량 300대 이상이 그대로 쓸려나갔다.
국경검문소 CCTV에는 사람들이 일제히 화면 아래쪽으로 달려나가는 장면이 찍혔다. 하지만 다 빠져나가기 전에 급류가 검문소 건물을 넘어섰고, 화면은 곧 잿빛으로 변했다.
카트만두에서 한인 민박을 운영하는 40대 한모 씨는 “네팔 생활 28년 만에 이런 홍수는 처음”이라며 “폭우가 아닌 빙하 담수가 터져 발생한 사태라 전혀 대비를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했다.
자연댐이 터졌다 #
네팔 수문기상국의 비노드 파라줄리 홍수예보과장은 “라수와가디 국경검문소에서 약 20km 상류에 얼음과 토사가 쌓이면서 강물이 막힌 흔적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무너진 잔해가 둑 노릇을 하며 뒤쪽에 물이 고여 임시 호수가 생겼고, 이 자연댐이 다시 터지면서 막대한 양의 물이 한꺼번에 아래로 쏟아졌다는 설명이다.
홍태경 연세대 지구시스템과학과 교수는 27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빙하, 눈 등이 한꺼번에 쓸려 내려오는 ‘데브리(debris)’가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과정에서 눈과 얼음이 녹고, 계곡에 있던 물과 합쳐지면서 홍수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그는 “수만 년간 얼어 있던 히말라야의 빙하와 눈이 기후 변화로 녹고 있다. 네팔 홍수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최명기 서울디지털대 건설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이번 참사를 건물 붕괴에 빗댔다. 위험이 서서히 쌓이다가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점에서 닮았다는 얘기다. 그는 “2000년대만 해도 히말라야에서 빙하로 인한 홍수가 5∼10년에 한 번 정도였지만, 최근에는 1년에도 여러 차례 발생할 만큼 잦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 새로 생긴 임시 호수 말고 기존 빙하호까지 함께 무너졌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현지 매체 카트만두포스트에 따르면 네팔에는 빙하 3252개와 빙하호 2323개가 있고, 이 가운데 20개가 위험 등급으로 분류돼 있다. 지난해에도 같은 일대에서 갑작스러운 홍수로 10명 이상이 숨졌다.
피해가 커진 데는 히말라야 특유의 지형도 한몫했다. 좁고 가파른 협곡에서 물과 진흙이 빠르게 뒤섞이면 ‘액체 콘크리트’처럼 변한다고 AFP통신은 전했다. 사람이든 차량이든 피할 수 없는 파괴력이다.
16좌 등정한 산악인의 경고 #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 등정에 성공한 산악인 엄홍길 대장(엄홍길휴먼재단 상임이사)은 27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네팔을 찾을 때마다 인간들이 만든 위험(지구 온난화)이 커지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불과 두 달 전에도 현지를 다녀왔다는 그는 빙하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해왔다고 했다. “처음 히말라야에 갔을 때만 해도 빙하들이 크고 단단해 빈틈이 거의 없었다. 해가 거듭할수록 빙하가 줄어드는 게 보였다.” 이어 “빙하가 녹으면 이번과 같은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구조를 가로막는 것들 #
인구 약 3100만 명의 네팔은 국제통화기금(IMF) 집계 기준 2024년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1381달러(약 190만 원)에 그치는 빈국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인명 구조부터 통신망 복구, 구호물자 전달까지 네팔이 국가의 기본 역량을 시험받는 상황에 놓였다고 평가했다.
라수와는 카트만두에서 북쪽으로 약 120km 떨어져 있다. 네팔 당국은 카트만두에서 라수와로 이어지는 도로 가운데 최소 42km 구간이 유실되거나 파손됐다고 밝혔다. 헬기를 빼면 육상 구조 장비가 들어갈 방법이 마땅치 않다.
라수와와 인접한 중국 티베트자치구도 이번 홍수 피해를 겪었는데, 이 지역에는 이달 30일까지 비와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예보돼 있다. 구조와 수색 작업이 한층 더 어려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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